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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칼끝으로 시대를 새긴 작가, 김훈

by 앤셜리짱 2025. 5. 22.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자전거를 타는 사람

김훈. 그의 이름은 이제 한국 문학에서 하나의 ‘장르’처럼 느껴집니다. 단단하고 묵직한 문장,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인간을 직시하는 태도, 자연과 사물에 대한 예리한 통찰까지.  그는 단순한 소설가가 아닙니다. 문장 노동자이자, 시대의 질문에 몸으로 응답하는 작가입니다. 김훈은 글을 쓰기 전에 자전거를 탑니다. 서울 외곽과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계절의 냄새와 바람의 흐름을 온몸으로 느끼며 문장을 떠올립니다. 그는 늘 현장에서 사유하고, 삶의 온도로 글을 쓰는 작가입니다.

기자였던 시절 – 글을 통해 세상을 기록하다

김훈은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시인 김광균, 문학적 DNA는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자연스레 심어져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김훈의 시작은 문학이 아니라 저널리즘이었습니다.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정치부, 사회부, 문화부를 두루 거쳤고, 문학부 기자로서 많은 작가와의 인연도 맺었습니다.

기자로 일하던 그는 현실의 구체성과 글쓰기의 윤리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책상에서 이론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사건 현장과 사람의 얼굴, 풍경과 목소리에서 시작되는 글을 배웠죠. 이 시절의 경험은 훗날 그의 소설에 고스란히 스며들게 됩니다.

그의 문장은 왜 특별한가

김훈의 문장은 읽는 순간 ‘아, 이건 김훈이다’ 하고 느낄 만큼 독특합니다.  군더더기가 없고, 철저히 절제되어 있으며, 사물의 본질에 닿기 위한 투박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이런 식으로 문장을 씁니다:

“나는, 버려진 자리를 사랑한다. 거기에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으므로.”

이러한 문장에는 경험에서 우러난 절제와 체념, 그러나 동시에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늘 ‘문장을 쓰는 일은 육체노동과 같다’고 말하며, 단어 하나, 쉼표 하나도 허투루 쓰지 않습니다.  김훈의 작품은 유행을 따르지 않습니다. 유려한 스토리도, 장대한 스케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는 인간을 정면에서 바라보며,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비루함조차 품어 안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바뀌어도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그의 글은 계속해서 독자에게 말을 걸 수 있습니다.

묵직한 문장으로 삶을 증명하는 작가

김훈은 단 한 줄의 문장을 쓰기 위해 하루 종일 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사람입니다. 그가 쓴 글은 단어의 조합이 아니라, 삶의 리듬으로 빚어진 호흡입니다.

그의 글을 읽는다는 것은, 잠시 멈춰 서서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 문장들은, 우리의 혼란스러운 일상 속에서도 삶의 단단한 중심을 지켜내는 하나의 등불처럼 다가옵니다.

김훈 작가의 대표작 깊이 읽기 – 인간과 역사, 존재를 묻는 문장들

김훈 작가는 '역사'와 '존재'라는 거대한 주제를 담담하면서도 깊이 있는 문장으로 풀어내는 드문 작가입니다. 그의 대표작들은 인간의 고통, 선택의 윤리, 삶과 죽음의 경계, 국가와 책임이라는 보편적인 문제를 치열하게 응시합니다.

『칼의 노래』 – 삶과 죽음 사이의 침묵을 쓰다

김훈을 단숨에 국민 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은 단연 **『칼의 노래』(2001)**입니다.
이 소설은 임진왜란의 명장 이순신의 시선을 통해, 전쟁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작품입니다. 흔히 영웅으로만 그려졌던 이순신을, 고독하고 망설이며 상처 입은 한 인간으로 풀어낸 이 작품은 그야말로 한국 현대 문학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버려진 자리에서 싸우고, 쓰러질 자리를 지키며 죽는다" 같은 문장은, 한국 사회의 현실과도 맞닿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김훈은 이 소설을 통해 역사의 이면, 영웅의 허무, 존재의 고독을 강렬하게 제시했습니다.

“버려진 자리에 남아 싸우고, 쓰러질 자리를 지키며 죽는다.”

줄거리로는 이 작품은 임진왜란 당시의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하지만 이순신은 단순한 영웅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터에서 생존을 고민하고, 상부의 부당한 명령에 고민하며, 죽음을 앞에 두고도 무너지는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충(忠)’과 ‘의(義)’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이순신의 내면은, 독자에게 영웅의 새로운 얼굴을 보여줍니다.

주제와 특징으로 영웅의 인간화: 이순신을 신화화하지 않고, 피와 땀으로 얼룩진 한 인간으로 그립니다. 전쟁의 부조리: 전투의 승패보다, 그 과정에서의 고통과 혼란에 초점을 둡니다. 문체의 힘: 짧고 단단한 문장으로, 칼처럼 벼려진 문체가 특징입니다.  『칼의 노래』는 단지 역사소설이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철학적 서사입니다. 무엇이 인간을 끝까지 버티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인간의 밑바닥을 직시하다 – 『남한산성』

김훈은 『칼의 노래』 이후에도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고통과 책임을 탐색합니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남한산성』(2007)**입니다.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이 피난해 있던 남한산성에서의 47일간을 그린 이 소설은, 굴욕과 선택의 딜레마를 이야기합니다. 주인공들은 모두 ‘옳은 선택’을 말하지만, 어느 하나 정답이 없다는 걸 독자는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김훈은 이 소설에서 역사의 본질은 승패가 아니라 인간의 태도와 판단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남한산성』은 2017년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 ‘민족의 자존심이란 무엇인가’ 같은 질문을 던질 때 자주 인용되는 작품입니다.

“의리는 무엇이고, 살 길은 무엇인가. 그 둘은 정말 함께 갈 수 없는 길인가?”

줄거리는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조선 조정은 청나라의 침공을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왕(인조), 신하들, 군인들, 백성들은 포위된 산성 안에서 47일간 버티며 항복이냐, 끝까지 항전이냐를 두고 고뇌합니다.  소설은 두 실존 인물인 **김상헌(척화파)**과 **최명길(주화파)**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역사적 비극의 복잡한 윤리를 입체적으로 그려냅니다.

주제와 특징으로 도덕과 현실의 충돌: 명분과 생존, 자존과 굴욕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간 군상. 역사를 대하는 태도: 김훈은 역사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장엄한 문체: 절제된 감정, 웅장한 서사 속에서도 인간의 체온이 살아있습니다.

『남한산성』은 역사의 선택 앞에 선 인간의 고독을 보여줍니다.
“무릎 꿇어야 살아남는가, 죽더라도 서 있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오늘날 정치와 도덕의 경계에서도 여전히 중요합니다.

현실과 맞닿은 이야기 – 『화장』과 『흑산』

김훈의 글은 역사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의 인간 군상과 삶의 비루함을 마주한 작품들도 다수 존재합니다.

**『화장』**에서는 노년의 한 남자가 병든 아내의 죽음과 동시에 다른 여인에 대한 욕망을 품는 이야기를 통해, 삶과 죽음, 사랑과 욕망의 경계를 예리하게 파헤칩니다.

**『흑산』**은 천주교 박해 시대를 배경으로, 종교와 이념, 인간의 신념이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다룬 소설입니다. 이 작품에서도 김훈 특유의 무거운 질문과 간결한 문장이 돋보입니다. 

『화장』 (2004)

“죽음을 앞둔 아내와, 살아 있는 여인 사이에서 나는 숨을 쉬었다.”

줄거리로는 중견 제약회사 부장 오상무는 아내가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자 간병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직장 내 한 여직원에게 감정이 생기며, 죽음과 욕망 사이에서 흔들리는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됩니다. 주제와 특징은 삶과 죽음의 병렬 구조: 생의 끝과 생의 시작을 함께 놓고 성찰합니다. 욕망에 대한 솔직함: 도덕적 비난보다는, 인간 본성의 이중성과 복잡성을 드러냅니다. 절제된 서술: 감정을 억누르듯 서술하면서, 오히려 독자에게 강한 여운을 남깁니다.

『화장』은 인간이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 있다는 감각을 어떻게 욕망하는가에 대한 작품입니다.  진부한 불륜 서사가 아니라,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상실의 감정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수작입니다.

『흑산』 (2011)

“어떤 신념은 목숨을 걸어야 하고, 어떤 회의는 그 목숨을 짓밟는다.”

줄거리로 1801년,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를 배경으로 한 작품입니다.  주인공 정약전은 형 정약용과 함께 박해를 받으며 흑산도로 유배당합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고립 속에서도 사유를 멈추지 않으며, 신념과 타협, 믿음과 회의의 갈림길에 선 인물들의 복잡한 내면을 마주합니다.  주제와 특징으로는 종교와 이념의 탄압: 단지 천주교에 대한 역사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모든 이념과 권력의 충돌을 이야기합니다.  철학적 내면 탐구: 인물들의 고백과 사유가 중심이 되는 내면 서사 구조.  풍경과 문체의 일치: 고요한 섬의 풍경과 김훈의 간결한 문장이 절묘하게 어우러집니다. 

『흑산』은 역사와 철학, 인간의 내면을 모두 담아낸 작품입니다.  신념이란 무엇이며, 그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버릴 수 있는가?  김훈은 이 질문을 통해 인간 존재의 근원을 파고듭니다.

『자전거 여행』 (2000~)

“길 위에서 나는 문장을 생각한다.”

 줄거리는 소설이 아닌 산문집이지만, 김훈 작가의 세계관을 가장 직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책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전국을 누비며 풍경, 사람, 역사, 사물에 대해 사유한 기록들이 담겨 있습니다.   주제와 특징은 육체와 언어의 연결: 글쓰기가 정신노동이기 이전에 신체의 감각에서 출발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자연에 대한 경외감: 사소한 풀 한 포기, 벼 이삭, 땅의 냄새까지 문장으로 포착합니다.  김훈식 산문의 진수: 문학 작법서 이상의 문장 철학이 담긴 책입니다.

『자전거 여행』은 김훈이 어떻게 세상을 보고, 어떻게 글을 쓰는지를 알려주는 창문과도 같은 책입니다.  그의 소설들이 보여주는 묵직한 통찰이 어떤 경험과 감각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마무리하며 – 시대의 언어를 벼리는 작가

김훈의 대표작들은 단지 문학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시대정신을 꿰뚫고 인간 존재를 되묻는 텍스트입니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거창한 역사나 거대한 사회 문제를 단지 '뉴스'로 넘기지 않고, 그 안에서 흔들리고 고뇌하는 인간 하나하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문장은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무게만큼, 우리 내면을 단단하게 다듬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김훈의 대표작들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시간이 지난 후 다시 꺼내 읽게 되는 작품들입니다